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문단 편집) === 역사연구상에선 위치연구에 고고학보다 1차 문헌사료를 더 중시한다? === 역사 연구 방법은 그렇지 않다.[* 문헌과 고고학자료가 서로 상충될 경우 대부분 고고학자료가 우선시된다. 문헌자료는 편찬자의 주관에 따라 추가되거나 빠지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고 악의적 왜곡, 잘못된 정보의 기록 등 우려가 있으며 후대 사람들이 왜곡, 조작할 가능성 또한 높다. 이 때문에 엄격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는 당시 사람들이 남긴 물질자료이므로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이다. 아울러 층서학에 의거한 층위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며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과 같은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어 신빙성을 더한다. 물론 유물 조작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밝혀졌다.] >인류 역사를 연구하는데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문헌 사료를 통하여 연구하는 문헌사적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실물 자료를 통하여 연구하는 고고학적 방법이다.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고고학적 연구 방법이 막대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맑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력사학도들의 초보적 기초 지식으로 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의 경우 문헌 사료가 특히 제한되어 있고 그것도 절대 다수가 인접 중국인들의 편견적이고도 전후 모순적인 부분이 적지 않은 기록인 조건 하에서는 고고학적 자료가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시기 학자들은 이러저러한 식으로 력사 지리 고증에서나 력사적 사실을 확정함에 있어서 고고학적 자료들을 리용하여왔다. 고조선과 관계되는 것으로서는 다음 동지들의 견해가 발표되었던바 우선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도 한다. > 동주신(佟柱臣)동지는 그의 론문 《고고학 상으로 본 한대 및 한대 이전의 동북 강역》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그는 말하기를 문헌상으로 비정한다면 전한 시기의 우북평 료서군의 북방계선은 오늘의 조양(朝陽)부근 즉 북위 42도 선이며 료동군은 개원(開原) 부근 즉 북위 42도 8분이 경계선으로 된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한다면 고 장성지가 적봉(赤峰)부근에 있으니 그 곳의 토룡(土龍)전설로 보아 필시 고장성은 장가구 혹은 덕화(德化)근처의 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장(圍場)을 거쳐 적봉에 이르렀을 것이다. >─────────────── > 일부 론자들 가운데에는 고고학 자료는 문헌 사료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조차도 없지 않다. 고대 희랍 로마사 연구에서와 같이 방대한 문헌 사료를 가진 곳에서조차 고고학적 발굴은 문헌 사료의 부정확성 부족점 등을 적지 않게 시정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도들이 왕왕 그 자료를 구체적인 력사적 사실과 결부시킴에 있어서 부정확한 론리를 전개할 수 있으며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당한 론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고학도들을 지적하면 모르지만 고대사연구에서 실물 사료의 제1차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부당한 견해이다. >** 考古學上漢代及漢代以前的東北疆域//考古學報 1956년 제1기 29-42페지 >---- >정찬영, 1963, 「고조선에 관한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고조선에 관한 토론 론문집』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상에서 1차 사료는 문헌자료로 두는 것이 원칙이며, 낙랑군의 위치 문제를 파악하는데도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우선시해야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연구상에 그런 공식은 없다. 복잡한 인간사를 그러한 단순불변의 공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 >단적인 예로 우리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지역을 고구려의 수도([[국내성]])로 비정하는 논거들만 보아도 이러한 발상의 허위가 너무나 분명해진다. 현재까지 집안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 [[적석총]]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가 지난 1600여 년간 왕릉 주변에 우뚝 서있는 것이 수도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고고 유적․유물들을 1차적인 판단 근거로 삼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성에 관한 여러 문헌사료들을 이와 더불어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 >낙랑군의 위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천기의 중국계통 고분들, 그리고 그 고분 내에서 발견된 중국계 인명(人名)과 군현 관리의 명칭 등이 새겨진 수많은 벽돌과 칠기(漆器) 유물들, 그 외에도 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중국군현 관련 출토품들을 1차적인 기준으로 삼고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 없는 ‘공식’ 하나로 일거에 부정하고, 자기 논리만을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만을 제시하는 방식은 의도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 >안정준(연세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1 [[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7&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